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반 투르게네프 (문단 편집) == 러시아에서의 대우 == >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파리에 살면서 유럽 내에서 조국 러시아에 봉사했다. 우리는 그에게 러시아 지식인의 대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문학, 미술, 음악에 종사하는 러시아 남녀 중에서 투르게네프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 > 막심 코발레프스키 러시아에서도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곳곳에 존재하는 등 톨스토이 못지 않은 대문호 대접을 하고 있다. 문학적으로 진부하고 작품속 등장인물은 정상이 없다며 도스토옙스키를 굉장히 낮게 평가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호들을 시험점수 매기듯 줄 세운다면 (선지자인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는 제외하고) 톨스토이가 단연 으뜸이며 두번째가 고골, 세번째가 체호프, 네번째가 투르게네프라고 평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낙제해서 자기 사무실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투르게네프는 프랑스로 추방된 상황에서도 러시아어 문학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직접 번역하여 서구권에 러시아 문학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가 서구권에서 반향을 일으키기 이전 러시아 문학은 아마추어 번역가들에 의한 불완전한 번역으로 피상적으로 소개되었었다. 투르게네프는 19세기 중반 기준으로 서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였는데, 이러한 자신의 입지를 활용하여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독일과 영국, 프랑스 출판사들과의 계약을 주선하는데 힘을 써주었다. 투르게네프의 주선 덕분에 곤차로프,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들이 유럽의 문학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보통 작가 사이에는 라이벌 의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투르게네프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톨스토이와도 종종 개인적으로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해는 커녕 오히려 적극 홍보해주는 대인배이기도 했다. 소련 시절에도 인민을 위하여 엄청 봉사한 위대한 작가로서 크게 우대받았다. [[러시아인]]들의 투르게네프에 대한 존경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국방군]]의 침략 때문에 화물칸 열차에 빽빽하게 피난민들이 탔는데, 그곳에는 독일군의 손에 훼손될까 봐 같이 옮겨지던 투르게네프의 소파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파에 안 앉았다고 한다.[* 출처는 리차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투르게네프가 쓴 《사냥꾼의 수기》가 러시아에서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한계나 어두운 면이 있었기는 해도) 농노 해방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부분 농노의 자녀 및 그 후손들인 러시아 국민에게 투르게네프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본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은인'''이다.]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자신이 주창하는 사상이나 작품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당대에도 인격자로 알려졌다. 그는 젊고 가난한 작가들의 육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농노 해방에 있어서도 실천적인 행동가였으며, 지식인의 '명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생아 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을 끝까지 책임지고 양육하며 교육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투르게네프는 생전에도 매우 존경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게네프는 농노 해방령이 선포되었던 1861년에 [[오룔]]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한 적이 있는데, 두 명의 농민들이 자신을 찾아와 ''''러시아 모든 민중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러시아 방식'으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던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